권력은 거울이다: 인간 본성의 드러남(Power as a Mirror: The Exposure of Human Nature) 리어 왕

권력은 거울이다: 인간 본성의 드러남 권력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할 때는 드러나지 않던 욕망과 두려움이 권력을 손에 쥔 순간부터 차갑게 드러납니다. 권력은 누군가를 지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쓰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개인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타인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 본성이 가진 양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모습은 반복되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은 권력이 사적인 이익과 결합할 때 얼마나 쉽게 국민을 배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권력은 국민이 맡긴 것인데, 그것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을 위해 사용했을 때 결국 사회 전체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또한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도 비슷합니다. 공익을 위해 추진된 개발이었지만, 권력과 이익이 얽히면서 불투명한 구조 속에서 일부 사람들만 이득을 챙겼습니다. 이런 일들은 권력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인간의 탐욕과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권력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확대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권력을 맡은 자보다 그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면, 그 불완전함을 견제할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권력과 인간 본성의 이야기는 정치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권력과 인간 뇌, 그리고 무너지는 본성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보았습니다. 권력은 뇌의 작동 방식을 바꿉니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도파민 분비가 높아져 자신감과 쾌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위험한 판단을 쉽게 내리게 됩니다. 리어 왕이 자신의 딸들에게 “누가 더 사랑하는지”를 묻고, 그 말 몇 마디에 따라 나라를 나누는 장면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라, 권력 중독이 뇌를 흐리게 만든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인간...

권력은 왜 자꾸 부패할까 햄릿(Hamlet)

권력은 왜 자꾸 부패할까 영화를 보다가 왕위 찬탈과 살인으로 세워진 권력이 결국 복수와 파멸로 가는 과정이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정치 스캔들이 떠올라서 이 글을 한 번 써보았습니다. 솔직히 한국 사회 뉴스를 보면 권력이라는 것이 꼭 사람들을 위해 쓰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도 결국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해서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민은 힘들어도 자기들만 이익을 챙겼고, 그 일이 드러나자 결국 촛불집회로 대통력이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도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을 보면 정치인과 돈 가진 사람들이 결탁해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또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문제나 주가 조작 의혹 같은 사건을 보면, 권력이 있으면 웬만한 규칙은 다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법과 제도가 있어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권력은 왜 자꾸 부패로 이어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이란 것은 원래 국민을 위해 쓰라고 존재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자기들 보호막으로만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권력 자체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시민의 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라진다면 같은 비극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Why Does Power Keep Leading to Corruption? While watching a movie about a throne seized through usurpation and murder, and how that power eventually collapsed into revenge and ruin, I was reminded of the recurring political scandals in Korean society. Honestly, when I read the news...

가난이라는 시스템, 결함 있는 설계(Poverty as a System, A Flawed Design) 목로주점 (L’Assommoir) (The Drinking Den)

 가난이라는 시스템, 결함 있는 설계 저는 영화 《목로주점》을 보면서, 이것이 단순히 술과 가난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함 있는 시스템 설계도’처럼 보였습니다. 제르베즈와 쿠포는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오류가 내장된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갔습니다. 마치 잘못 설계된 기계가 아무리 새 부품을 넣어도 계속 고장 나듯, 그들의 삶은 애초에 불평등과 가난이라는 코드에 의해 고장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학에서 시스템은 항상 입력(input)과 출력(output)으로 설명됩니다. 입력이 불공정하다면, 아무리 기계가 잘 작동해도 출력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르베즈가 아무리 노력해 세탁소를 열어도,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사회적 편견이라는 입력값은 결국 그 출력을 파괴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한국 사회의 빈곤 세습 구조와 겹쳐 보였습니다. 부모 세대의 가난이 자녀 세대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구조는 마치 버그가 고쳐지지 않은 프로그램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엔지니어라면, 이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설계할 것입니다. 가난이 심화되기 전에 자동으로 지원이 가고, 알코올 중독 같은 사회적 병리가 감지되면 치료와 교육 프로그램이 강제적으로 개입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개입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도의 오작동은 오히려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습니다. 졸라가 말했듯, 인간은 본성보다 조건에 의해 규정됩니다. 공학적으로 말하면, 하드웨어(인간성)는 같아도 소프트웨어(환경)가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학이 사회와 만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시스템은 사람을 살리는가, 아니면 사람을 무너뜨리는가? 저는 앞으로 공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효율적이고 빠른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까지 ...

도덕이라는 알고리즘, 불완전한 설계(The Algorithm of Morality, An Imperfect Design)

  도덕이라는 알고리즘, 불완전한 설계 저는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서, 이것이 단순한 러브스토리나 사회적 위선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완전한 시스템의 설계도처럼 다가왔습니다. 안나는 사회의 코드 위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변수는 곧 오류로 취급되었고, 시스템은 그것을 삭제함으로써 스스로의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공학에서 설계자는 항상 효율과 안정성을 고민합니다. 그러나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안정성’은 종종 권력자의 편의와 기득권의 유지로 전락합니다. 안나가 받았던 심판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시스템의 자기보호에 불과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시스템적 결함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여전히 오류로 낙인찍히고 배제당할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현대 사회의 AI 알고리즘 편향 문제를 떠올렸습니다. 인공지능은 중립적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설계자의 가치관과 사회의 불평등이 고스란히 코드화되어 있습니다. 범죄 예측 알고리즘이 가난한 흑인 청년을 더 높은 위험군으로 분류하거나, 채용 시스템이 여성 지원자를 자동으로 탈락시키는 사건들이 이미 현실에서 벌어졌습니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위선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더 정교하게 재생산합니다. 이것은 안나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배제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과학과 공학은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묻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더 정교하게 구속하는가? 도덕과 정의가 불완전한 코드라면, 그 위에 세운 기술은 또 다른 오류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가 설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기능적 효율이 아니라, 인간성을 보호하는 윤리적 시스템입니다. 저는 앞으로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기술을 도덕과 분리된 중립적 도구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을 닮습니다. 따라서 좋은 설계란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천문: 세종대왕과 장영실》

저는 영화 《천문: 세종대왕과 장영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왜 침묵당하게 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장영실은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와 자연의 원리를 기록하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혼천의, 자격루, 앙부일구 같은 발명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집요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고, 어떤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세종은 그런 장영실을 누구보다 아꼈지만, 정치적 질서와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앞에서 끝내 그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진실을 말한 사람이 오히려 공격을 받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소외됩니다. 내부고발자,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 공무원, 과학자, 기자들이 결국 자리를 잃고 사라지는 현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기술은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장영실이 하늘의 이치를 기계에 담았듯, 저 역시 로봇공학을 통해 사람의 삶과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권력의 입맛대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진실은 왜곡되고 사람은 침묵하게 됩니다. 저는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려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방식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더라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말을 기술로 지지해주는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입니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사라지는 사회는 결국 그 진실까지 함께 묻히게 됩니다. 저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술을 배웁니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산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족쇄가 되는가(Is Legacy a Path to Freedom, or Just Another Chain?)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유산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족쇄가 되는가 사람들은 흔히 ‘유산(legacy)’을 축복처럼 여깁니다. 부모가 남긴 재산, 사회가 물려주는 제도, 전통이라는 이름의 기억들. 그러나 《위대한 유산》은 이 모든 것을 정반대로 비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핍이 신사로 만들어진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갑작스러운 ‘위대한 유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사회 전체를 봤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나 "가문"은 일종의 유산처럼 기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남들보다 높은 계단을 밟고 있고, 어떤 이는 출발선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유산’을 받은 사람조차도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핍이 결국 깨닫듯, 유산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를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합니다. 저의 의문점은 혹시 ‘유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부모의 재산, 사회의 제도, 심지어는 종교와 도덕까지도 사실은 물려받은 환상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진리처럼 믿지만, 실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핍이 후원자가 하비샴 부인이라고 착각한 것처럼. 진실은 늘 예상 밖의 장소에서 드러납니다. 저는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그 건물은 부와 성공의 상징이자, 후대에 물려줄 ‘도시의 유산’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죽음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사회가 자랑스럽게 쌓아올린 것이 얼마나 쉽게 환상으로 무너지는지, 우리 모두 그 사건에서 확인했습니다. 위대한 유산을 보고 난 뒤 저는 더 이상 "유산은 축복이다"라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과연 자유로 가는 사다리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감옥의 철창일까? Is Legacy a Path to Freedom...

신념은 구원의 길인가, 또 다른 감옥인가(Is Belief a Path to Salvation, or Another Prison?)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2005)

신념은 구원의 길인가, 또 다른 감옥인가 저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보면서 단순히 “전쟁 영화”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신의 이름을 외치며 죽고 죽였는지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칼과 방패보다 무서운 건 사람을 움직이는 신념이라는 걸 느껴서 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보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전쟁의 잔혹함이 아니라, 신념이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은 신의 도시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살라딘 또한 “알라의 의지”를 말하며 전쟁을 정당화했습니다. 서로 다른 신을 부르짖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같은 이유로 싸운 것입니다. 신념은 그들에게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눈을 가리는 가면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까지 종교를 숭배하는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확실한 세계 속에 살았고. 죽음, 고통, 불평등 같은 문제 앞에서, 종교와 신념은 답을 줍니다. 믿으면 두려움이 줄어들고, 불합리한 현실도 설명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택하고, 그 신념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신념이 한계를 넘어설 때입니다. 신념은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서로 죽이게도 만듭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예를 들어, 일부 종교 단체가 팬데믹 시기에도 “신이 지켜주신다”며 방역을 거부했던 사건이 떠오릅니다. 그 신념은 믿는 자에게 위로가 되었겠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종교만이 아닙니다. 정치적 이념, 학벌, 심지어는 ‘애국심’이라는 이름까지도 신념처럼 숭배됩니다. 그리고 그 신념이 도덕보다 앞설 때, 인간은 언제든 타인을 희생시키는 괴물이 됩니다. 영화 속 발리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돌과 흙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지킨다면 신의 도시가 될 수 있다.” 저는 이 말이 종교와 신념의 본질을 꿰뚫는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결국 인간이 만든 상징이고, 진...